ACTIVIST - KI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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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ty 이보람, support@dj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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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양한 문화와 그 안에서 크고 작은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디제이코리아 매거진, 그 두 번째 PEOPLE, ACTIVIST 김한.


김한_ACTIVIST


만남을 약속한 상수동 이리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 김한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곱게 땋은 머리칼과 수염, 커다란 배낭, 그리고 스케이트보드를 들고 구석 자리에 앉아있던 그를 햇살이 좋은 창가로 인도하고 히비스커스티를 주문하고 나서 우리의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매사에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그답게 인터뷰 중 티팟 뚜껑을 찻잔에 요란하게 떨어뜨리고는 "저한테 이정도는 별일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웃는 그를 보며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HTPE(Han the Positive Energy)가 무엇인지 체감한 순간이었달까?

김한은 국내를 주 무대로 활동하는 ACTIVIST다. 사람과 자연을 위해 다양한 캠페인을 펼치고 있고, 클럽 레이버들을 취재하는 리포터, 댄서, 악기연주가, 여행가,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다. 인생에 대한 가치관, 음악 취향까지 확고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땐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인터뷰를 이어갔다. 유쾌함 속에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는 김한의 다이나믹한 인생 스토리는 듣는 내내 흥미로웠고, 신선했다. 하는 일이 많은 만큼 하루 하루 일어나는 에피소드가 많은 탓에 한마디 질문에도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렇기에 장문의 인터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알면 알수록 어떤 사람인지 더욱 궁금해지는,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김한과의 인터뷰를 공개한다.






자기소개 부탁한다.

반갑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김한이라고 합니다. 평양냉면, 왕만두, 초록매실, 김치를 좋아합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매거진 인터뷰는 처음으로 알고 있다. 소감이 어떤가?

사실 매거진 인터뷰가 처음은 아니다. 메이저한 매거진이 아니었기 때문에 검색이 잘 안 됐을지도 모르겠다. 영국에 잠시 머무는 동안에도 길거리 캐스팅이 돼 스트릿 패션 잡지와 인터뷰를 했었다. 패션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 나눴었는데, 매거진 이름을 기억 못 해 기사를 찾아볼 수 없는 게 조금 아쉽기도 하다. 인터뷰 소감이라고 하자면 조금 많이 쑥스럽다. 디제이코리아에서 나를 어떻게 알고 연락했는지 신기하기도 하다. 감사하고, 그리고 또 고맙고, 미안하다. 우연한 계기로 시작해 언젠가부터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인터뷰 하고 있다. 오랜만에 인터뷰를 받는 입장으로 돌아오니 굉장히 어색하다. 앞으로 인터뷰를 진행할 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사진으로 봤을때도 그랬지만 직접 만나보니 더욱 수염이 시선을 끈다.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기도 한 수염은 언제부터 기르기 시작했나?

정확히 말하자면 2016년 10월 18일. 자연스럽게 기르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햇수로 10년이 넘었다.


기르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첫째는 군대에서의 경험 때문이고, 둘째는 나만의 철학적 이유에서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매체를 통해 수염 기른 사람들을 많이 봤다. 나의 아버지와 고모부도 수염이 많은 편이셨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언젠가 나도 기르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수염이 빨리 자라는 편이라 군대 입대 후 용모단정을 위해 하루에 두 번, 힘든 날엔 그 이상 면도를 해야 했다. 다른 나라 군인들은 흔히들 수염도 기르고 하던데 타인의 요구로 이렇게까지 면도를 해야 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전역하면 면도를 절대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2016년 10월 18일부터 면도를 안 하고 기르다가 중간에 몇 번 자르고 다시 자란 모습이 현재의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수염을 기르는 사람들은 대략 세 가지 정도의 이유에서라고 보면 된다. 첫 번째는 귀찮아서. 두 번째는 본인의 개성. 세 번째로는 건강상의 이유 정도 있는 것 같은데, 민감성 피부라거나 뭐 비슷한 이유 말이다. 나 같은 경우는 셋 다 아니고 좀 더 철학적인 이유에서였다. 이 친구들이 계속 피부를 뚫고 나오는데 피부를 깎아 가며 잘라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 기른 시간이 있다 보니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수염을 가지고 멋을 부려 본적은 없다.


개성 있는 스타일과 남들과는 다른 행보로 '넌 참 특이해', '역시 김한'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이러한 타인의 시선이 좋을 때도 있지만 부담스러웠을 때도 있을 것 같다. 어떤가?

요새는 부담의 영역이 더 큰 것 같다. 시선뿐 아니라 타인과 만남 또한 그렇다. 예전에는 내가 먼저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타입이었다. 밤새도록 춤추고, 술도 조금 마셨는데 헤어짐은 언제나 아쉬우니까. 이사람이랑 다음에 또 놀면 엄청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통성명을 하고 친구가 되고, 다음에 다시 만나면 엄청 반가웠다. 서로 연락하지 않고 어딘가 놀러 갔는데, 거기에 그 사람이 있으면 그게 또 엄청 반가운거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친구의 친구를 알게 되고, 그 친구의 친구, 어떤 때는 가족들도 알게 된다. 이제는 어떤 클럽을 가도, 누구의 파티를 가도 친구들이 있다. 서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지만 결이 맞으면, 말이 잘 통하면, 그냥 분위기가 좋아서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이게 가식이랄게 하나도 없어서 정말 좋았는데, 요즘엔 나를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다. 감사하긴 하지만 나는 연예인이나 공인은 절대 아닌데 괜히 조심해야 할 것 같고, 뭔가 부끄럼이 많이 늘었다. 친구를 사귀는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타인이 바라보는 김한과 스스로가 생각하는 본인의 모습에 차이점이 있다면?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개성 있다는 걸 나만 모르는 느낌인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특이한 사람들은 진짜 많다. 이상한 사람들도 많다. 특별한 사람도 흔치는 않지만 많다. 대단한 사람들도 있고... 나는 특이한 거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딱히 뭐 특별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게 봐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매번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잘 지내온 것 같기도 하고. 아주 빚만 잔뜩 있는 미스터 부채. 그게 나 김한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요새는 잘 되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든다. 성공과는 정반대의 삶이었는데, 갚아야 할 게 많다. 나를 사랑해주는, 좋아해주는, 믿어주는 모두에게 2~3배로 돌려주고 싶다. 아, 내가 잘 나가는 곳은 하나 있는데, 우리집. 한번 나가면 이틀, 3일씩은 못 들어가고 그러니깐.




쉬는 날엔 무얼 하나?

몸을 가만히 냅두는 걸 못 견디는 성격이다. 한동안 일을 쉬어 본 적이 없기도 하고. 여행을 다녀오고 좀 바뀐듯 했는데, 한국에 돌아오고 삼 주가 되니 폼이 다시 돌아오더라. 현재 투잡 상태다. 다음 달 안으로 쓰리잡 혹은 포잡까지도 늘어날 것 같다. 쉬는 날에는 굳이 일하는 가게에 들러 일을 거든다거나, 이삿짐 나르기, 이케아 가구조립, 애 봐주기, 페인트칠 등등 많은 일을 한다. 물론 아무나 도와주는 건 아니고 돕는 대상은 모두 친구들이다. 받은 게 많아 일단은 이런 식으로 갚아 나간다고 생각한다. 받은 만큼 그 이상을 돌려주고 싶으니까.

누군가를 돕는 것 외에도 합주, 개인 레슨을 받거나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하고, 미팅도 한다. 조기 축구도 했었다. 또, 스케이트보드를 타거나 책을 읽고 집안에서 가벼운 운동을 하기도 한다.


취미도 결국 일의 연장선인건가?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취미가 된다. 아직 확실한 직업이 없는 이유기도 하다. 전문성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느끼던 때가 있었는데, 욕심이 많아 아무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겠더라. 일단 삼바, 춤, 요리도 있고, 가끔 그림도 그리고, 이것저것 만드는 것도 좋아하는데 이 모든 것에 음악이 빠지는 일은 없다.


김한의 삶의 모토는?

내가 속해있는 팀 리더인 자이온루즈가 그랬다. '인생은 언제나 카니발'이라고. '인생은 언제나 카니발'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의미를 갖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매년 부활절 기간에 카니발을 한다. 여기에 브라질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열정, 돈 심지어 목숨까지도. 모든 게 걸린 카니발이다. 심사위원들이 카니발에 참여한 팀들의 점수를 매겨 매해 채점을 하고,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팀은 순위에서 강등을 당한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팀은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며, 강등팀 중 어떤 이는 이를 비관하며 목숨을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그들은 다시 카니발을 준비한다. D-365가 된거다. 영광스러운 기쁨도, 모든 걸 다 잃은 것 같은 좌절도 오래가지 않는다. 다음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인생도 이와 비슷하다고 했다. 우리는, 나는,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넘어질 것이고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카니발은 일 년에 한 번 있지만, 우리 인생의 카니발은 몇 번 있을지 모른다. 얼마나 많을지, 적을지 계산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가만히 있을 시간이 있나. 다시 또 준비하는 수밖에. 인생은 언제나 카니발이다. 카니발의 끝은 다음 카니발이 올 것을 알려준다. 아직 안 왔을 수도 있다. 그러면 아직 준비할 시간이 더 남았다고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받아들이기 힘들지라도 아픔과 슬픔 또한 모두 다 카니발이다.


ACTIVIST라는 직업은 한국 사회에선 아직 생소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김한의 어렸을 적 꿈과 ACTIVIST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어렸을 적 꿈... 꿈이라는 단어를 처음 쓰기 시작할 때의 나는 개그맨. 그때가 초등학생이었는데, 사실 그 나이 때는 마냥 웃기고 재미있고 그럴 때니까 매일 집에 돌아오면 최불암 시리즈나 유머 모음집 보면서 연습하고 학교 가서 얘기하고 그랬다. 그때부터 구닥다리를 좋아해서 지금까지도 고전이 제일 웃기고 옷도 구제가 더 좋고. 그렇게 애들이 좋아서 동화 작가, 자연이 좋아서 환경운동가, 모든 게 다 합쳐져서 사회복지사 이런 식으로 구체화된 것 같다.

가진 거라곤 건강한 몸뿐이라 열여섯, 열일곱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여기저기 봉사 활동하러 다녔는데, 분야도 장소도 위치도 아주 다양하게 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가리지 않고 다 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아주 잘한 것 같다.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시간이 없어서 못했을테니까. 시간이 '남으면'이 아니라 봉사하러 가는 시간을 '만들어서' 다녔다. 거창한 이유 없이 그냥 그게 재미있었다. 쓸모도 있어 보이고. 일단 굶고 다니지는 않으니까. 가끔 술도 마시고. 스스로 봉사활동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서 봉사 시간도 안 받았는데, 서류상으로 존재하는 게 적어서 이제는 이런 식으로 얘기하지 않으면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사진밖에 없다는 게 조금 아쉽다. 그래도 결국 다 추억이라 사람들이 잊지만 않고 기억해준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내 머릿속에도 남아있고.

가톨릭 청소년 운영위원회서부터 김포시 장애인 복지관, 국제앰네스티, 그린피스, 서울환경운동연합, 라퍼커션, 어반스트라이커즈까지 다양한 단체들과 함께했는데 시작은 되게 단순했다. 단체에 도움은 되고 싶은데 벌이가 없으니 후원은 못하겠고 돕고는 싶고 애매한 상황이었던 거다. 돌이켜보면 그냥 지나칠 수 도 있었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나 보다. 현장에서 자원봉사자로 그들과 같이 연대하며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고 자연스럽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이주가 되고, 이주가 한 달이 되면서 사람들과 친해졌다. 그러다 다른 단체들도 알게되고, 다른 단체에 있는 행사에도 가고, 어느 순간 거기서도 일을 도와주고 있더라.

돈은 언제나 우선순위와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시간상으로는 더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필요한 만큼만 벌어서 생활했고, 오늘 도와줬으니까 고생했는데 밥 먹고가 이런 식의 나날들이었다. 내가 쓰는 만큼 나오는 교통비나 휴대폰 통신비, 합주끝나고 다 같이 먹는 밥값 정도? 아니면 술자리 이정도? 그래서 주변사람중에 일손 필요한곳 따라다니면 주는 하루 일당들로 생활비 마련을 했다. 이때 특히 많이 챙겨준 게 충훈이형이었는데, 나를 좋게 봐준 형이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같이 무대 설치, 음향 장비 옮기는 일을 했다. 이런 일들이 나중에 다 쓸모가 있더라.

그러다 군대도 다녀오고 팀 활동이나 사회 생활에 필요한 생활비등을 마련해야 해서 아르바이트도하고 그러다보니 예전의 생활패턴으로 다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여기저기 인원 교체들도 많이 일어나고. 현재까지 꾸준히 교류가 있는 곳은 서울환경운동연합, 라퍼커션, 어반스트라이커즈다. 상대적으로 전처럼 시간이 많은게 아니다보니 내가 가능한 시간에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직접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이것저것을 기획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ACTIVIST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고 봐도 되겠다.


활동하고 있는 라퍼커션, 어반스트라이커즈, 서울환경운동연합에 대해 소개 부탁한다. 각 단체에서 활동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는다면?

라퍼커션은 한국에서 바투카다(삼바레게)를 하는 팀(블로코)이다. 어반스트라이커즈는 서울, 전주, 파리에서 본인의 영역에서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이 모인 집단이다. 서울환경운동연합은 서울을 주축으로 전국의 여러 환경 관련 이슈를 매체를 통하여 내보내고, 시민들에게 거리에서 공원에서 직접 대면으로 국내의 환경 문제들을 노출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서로 다른 세 단체를 이어주는 허브가 내가 될 수 있다는 건 다르게 얘기하자면 여러 경험을 하면서 쌓아온 노하우들로 세 단체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건 김한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혼자선 절대 불가능했던 일들이 진심을 통해 전달 되었고, 홍대거리에서 어반스트라이커즈와 라퍼커션, 서울환경운동연합이 힘을 합쳐 퍼레이드를 했던 날이 '2년 전 오늘'에 뜨더라. 날짜가 4월 16일이어서 퍼레이드 참여 인원들과 함께 각자 노란 리본을 달거나 붙이거나 했는데, 많이 고마웠다. 지금도 부족한게 많은데, 그때의 나는 한참 더 부족했다. 퍼레이드를 더 잘 해내지 못한 게 많이 아쉽고 참여해준 모든 멤버들에게 미안하다. 아쉬움은 더 나은 다음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이 경험이 양분이 되어서 여태 이것저것 할 수 있었나보다.



출처_김한 인스타그램


ACTIVIST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활동가로서 이루고 싶은 꿈은 지금 활동하고 있는 단체들과 하는 캠페인이 목표에 맞게, 처음 기획한 방향대로 잘 진행되게 만드는 것이다. 기획단계부터 참여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무언가에 보탬이 되는것. 지금까지 다양한 캠페인을 해왔는데 모두 좋게 끝나지는 않더라.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준다는데 간절함이 조금 모자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아도 가슴에 묻고 계속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는 의지가 중요한 것 같다. 더 밝고, 더 쉬운 캠페인들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나로 인해 이 모든 활동들이 이어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나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았다면 그 또한 ACTIVIST로서의 할 일을 한 것 일수도 있다. 되게 폭이 넓은 분야 같다. '정글의 한'도 ACTIVIST로서 진행하는 이벤트라 할 수 있는 거고, 가끔은 조금 엉뚱한 꿈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아니면 이상적이라던가. 나 같은 경우는 맨발로 살기, 좋은 아빠 되기. 뭐 이런 거다.


김한을 보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춤이 있다. 바로 우숲지댄스. 우숲지댄스의 탄생 일화가 궁금하다.

우숲지댄스는 서울환경운동연합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캠페인이다. 여기서 우숲지는 '우리 동네 숲 지킴이'의 줄임말. 우숲지댄스 이전에 신고리댄스라는 게 있었다. 신고리 원전 백지화를 외치며 만든 댄스였는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덕분에 우숲지 캠페인을 시작할 때 노래부터 춤까지 전반적인 기획단계에서부터 참여 할 수 있었다.

작곡은 친하게 지내는 프로듀서 앰비발렌 작업실에서 했는데, 위층에서 작업실을 사용하고 있던 래퍼 싸일러가 작업 취지를 듣고 흔쾌히 녹음에 필요한 장비와 코칭을 도와주었다. 앞서 말한 대로 더 밝게, 더 쉽게. 신선한 캠페인을 원했던 나는 댄스홀이라는 장르가 빌보드를 비롯 세계적으로 많이 유행하고 있었던 점. 자이온보트 심선장님의 추천. 평소 레게음악을 즐겨듣던 편이라, 나한테 제일 잘 어울린다 생각하며 작업했다. 상어가족 수준의 대유행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주변에서의 반응은 좋았다. 우숲지는 내가 로고작업, 작곡에서부터 작사, 녹음 그리고 퍼포먼스까지 모든 제작 과정에 참여한 캠페인이다. 디자인을 해준 정가는 어반스트라이커즈의 멤버이다. 티셔츠 제작에는 오와칠호 브랜드의 대표 원규형이 도와줬다.

한동안 김한을 만나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우숲지 영상 찍기였는데, 흔쾌히 함께 찍어준 모든 사람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싶다. 올해 7월 1일 이후로는 우숲지를 보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글을 읽고 관심이 생겼다면 인터넷 검색창에 savingseoulparks.com 혹은 도시공원일몰제를 검색해주기를 바란다.




김한을 소개할 때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언더그라운드 클럽 신과 레게, 스카, 아프리카 춤, 악기 연주까지. 다양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데, 음악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좋아하는 걸 굉장히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 앞에서 재롱떠는 걸 좋아했다. 김포 백일장에서 열린 장기자랑에서 무대 위에 올라가 춤추고 입상해서 쌀을 받았다. 근데 대박인 건, 참가자 명단에 없이 그냥 기웃거리다가 올라가서 춤추고 받은 것. 소소하게 가정에 보탬이 되니 부모님도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셨지만, 아직까지 이러면서 살 줄은 나도 몰랐기 때문에 지금은 모두 다 조금씩 당황스러운 기분. 진심이 조금 섞인 농담이다.

요즘은 음악 싫어하는 사람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나도 음악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고, 언제나 음악 안에서 살았던 것 같다. 춤출 때도 음악이 있어야 하니깐. 춤출 때 특히 많이 끌렸던 음악이 타악기가 많이 들어간 그런 노래들을 좋아했는데 당시에는 장르에 대해 잘 몰랐던지라 적당히 춤추는 음악. 이런식으로 퉁쳤다. 한 동안 춤과 멀어져 있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때도 연습실을 안 나간 거지 춤추는걸 쉬어 본 적은 없다. 이 부분에서는 아주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나를 클럽에서 만난 사람이라면 더더욱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19살 때부터 종종 거리에서 연주하는 팀을 봤는데, 20살이 되고 팀 이름이 라퍼커션이라는걸 알았다. 당시에 멤버 모집을 한다길래 막연하게 비전공자인 내가 이걸 어떻게 하겠나 싶었다. 세계의 다양한 이라는 의미로 월드뮤직을 기대하며 간 첫 페스티벌 월디페. 하지만 끝없이 나오는 EDM으로 고통받던 내게 어쿠스틱으로 귀정화를 시켜준팀이 라퍼커션이었다. (당시에 조그맣게 디제이코리아 부스가 있었는데 여기서 한진이형이 드럼 앤 베이스 틀었나.. 몇 안 되는 좋은 순간들) 이날이 계기가 되어 1년의 고민을 정리하고 라퍼커션 멤버 모집 신청서를 작성했다.

이후, 합주에 참여했는데 너무 익숙한 음악이 나왔다. 이게 삼바라고 했다. 내가 춤출 때 들었던 음악이었다. 고향 친구를 만난듯이 기뻤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다 보니 공연도 더 나가고 합주 때는 연주를 했지만, 공연에서는 퍼포먼스를 맡았다. 잘 할 수 있는걸 더 잘하자는 마음이 컸다. 팀의 이름이 적혀있는 깃발을 흔드는 게 좋았다. 우리 팀을 대표하는 느낌이니까. 팀 내에서 제일 작은 김한이 팀에서 제일 큰 깃발을 맨 앞에서 흔들며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었다. 솔로 타임도 생겼다. 점점 더 눈에 띄었다고 해야 하나. 좋게 봐주는 사람들이 있더라. 단지 좋아하는 걸 열심히 했을 뿐이다. 전공자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꾸준히 하니깐 연주도 조금씩이지만 실력이 늘더라.


좋아하는 뮤지션은?

굉장히 난감한 질문이다. 좋아하는 뮤지션이 너무 많다. 미리 보내준 질문지를 보며 답을 생각하고 있을 당시, 옆에서 316분짜리 Brand New Heavies 믹스셋이 나오고 있었다. 작년 2019 한국에 온다고 했는데 페스티벌이 취소되는 바람에 못 왔다는 소식을 바르셀로나에서 접했다. 어차피 못 볼 운명이었지만… 음악은 두루 잘 듣는 편인데 컨츄리와 EDM(특히, 더욱!)은 잘 안 듣게 되더라. 하지만 테일러 스위프트는 내 이상형이 아님에도 아름답다. (앨범 있음)


요즘 많이 듣는 노래와 인생곡 추천?

요즘 제일 많이 듣는 노래는 'iration steppas - cool down ya tempa'. Iration Steppas는 덥(DUB) 장르의 뮤지션이다. (덥=레게 음악의 한 갈래) 로토톰이랑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DAW에서 두 번 봤다. 몸이 먼저 움직여질 정도로 에너지가 엄청나다. 노래 자체는 진정하라는 내용인데, 실제로는 절대 그럴 수가 없다. 근데 유튜브에 검색해보니 안나오더라;; 그래서 유튜브에 있는 노래로 추천하면 Danny red의 'Jahoviah' 덥. 로토톰에서 처음 만나 친해진 영국 친구들 덕분에 영국에 있을 때 이 친구들 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이름은 Osvaldo와 Victoria. 요리하고, 술 마시고, 커피 마실때마다 내가 계속 이 노래만 틀어 달라고 했다. 추억이 많은 노래다.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때 이 노래를 듣는다. 그 친구들은 I&I 장단의 달타령을 들으면서 내 생각을 한다고 한다.

인생곡은 Alrindo Cruz의 'Meu Lugar' 쌈바다. 내가 살던 곳은 쌈바가 끊이지 않는 곳, 더 나은 세상을 바라면서 열일하는 사람들. 평화로운 이 곳. 가사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브라질레이루. 포르투갈어로 브라질 사람을 이렇게 부르지만 열심히 살고, 열정적으로 사는, 맥주를 좋아하는 브라질 사람. 그들을 대변하는 단어다. 이 노래는 내가 정말로 브라질에 가고 싶어지도록 만드는 노래다. 이 노래만 있으면 어디에 있던 그 순간만큼은 날 브라질로 데려다주는 마법같은 노래이다.


언더그라운드 신, 서브 컬처의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한이 바라본 한국의 언더 & 서브컬처 신은 어떤 모습인가?

전혀 중심이라고 할 수 없다. 중심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일단 나는 디제이가 아니기 때문에. 쌈바는 진짜 작고, 레게는 있었는데 많이 사라졌다가 요새 다시 조금씩 늘어나는 중. 그래봤자 김한 피셜이다. 믿을만한 정보는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언더 & 서브 컬처는 내가 감히 얘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신을 위해 굉장히 오래도록 희생하고 노력해온 형, 누나들이 있고, 있었고, 내 친구들도 그들 중 하나고, 나도 내가 몸 담고 있는 분야의 것들과 깊이 사랑에 빠져있다. 서로를 리스펙 하는 마음 가짐만 있다면 모두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김한이 생각하는 디제이 & 디제이 문화란?

디제이들에게는 매번 감사하는 마음이다. 실제로 신에서 잘하고 있는 디제이들을 보고 있으면 배울 점이 많다. 그들의 태도나 임하는 자세 같은 것들 말이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곡이 나오는데, 아뿔싸.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좋은 노래들도 너무 많다. 전 세계에 있는 디제이들이 노력해주는 덕에 이제는 집에서도 끊김 없이 좋은 셀렉션들을 들을 수 있다. 파티에 가면 현장의 분위기에 따라 디제이들이 어떤 노래를 어떻게 틀지 보는 것도 재미있는 요소 중 하나. 나는 해외 유명 디제이들은 잘 모른다. 해외 디제이들의 플레이를 들을 이유가 없다. 매주 우리나라 로컬 디제이들의 기가 막힌 플레이를 라이브로 볼 수 있기 때문. 실제로 우리나라 디제이들이 정말 잘한다. 해외에 와서 제대로 느낀 부분.

흔히 말하는 국내 서울에서 활동하는 언더그라운드 베뉴의 디제이들은 거의 다 아는 것 같다. 부산에도 조금 있고, 다른 지역은 잘 모르겠다. 왜? 라고 물어보면 일주일에 클럽을 4일은 갔으니까? 자주 가니, 자주 보고, 자주 만나고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사장님들이랑도 인사하는 사이. 서포트 유아 로컬 디제이! 믹스믹스, SCR 모두 화이팅이다.

한국이 유독 디제이 데뷔가 빠른 것 같다. 장단점이 있기에 나쁘다 할 수 없다. 누구나 디제이가 될 수 있는 곳이지만 아무나 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밥 먹을 돈으로 판사고 음원 구매하는 디제이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요새 느끼는건 프론트맨이 정말 중요하다는것. 앞선에서 디제이와 클러버들을 이어주는 기름 같은 사람이다. 불을 더 활활 타게 만들어주는 기름이 될 수도 있고, 김과 밥을 붙게 해주는 참기름 같은 존재도 될 수 있는것 같다. 프론트맨의 역할은 무조건 신나게 놀기! 플로어의 얼음을 깨주는 그런 사람. 예전엔 꽤나 있었는데, 요새는 잘 안 보이는 것 같다. 내가 돌아왔으니 기대를 해달라. 이 부분에서만큼은 외국에서도 밀리지 않더라.


긴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지 얼마 안 된 걸로 알고 있다. 여행은 어땠나?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무엇이 더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부족한 것을 채워나갈 앞으로의 시간이 기대된다.

217일 동안 6개국, 20곳이 넘는 장소에서 하루 혹은 그 이상의 밤을 보냈는데, 에어비앤비는 프랑스에서 한번, 터키에서 세 번 사용한 게 전부다. 나머지는 원래 알고 있거나 여행 기간 중 알게 된 친구들 집에서 먹고 자며 생활했다. 이게 이번 여행 중 되게 큰 빚 중 하나.

여행 기간 중 결혼식 축가를 세 번 부르고, 바르셀로나에서 한 번, 코트디부아르 아비장에서 한 번, 총 두 페스티벌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떠나기 전에 한국에서 빤데이루라고 쌈바 악기를 들고 갔는데, 악기 두들기며 걸어 다녀도 사람들이 신경을 안쓴다. 공원에서 치고 있으면 어디서 하나 둘 모여들어 함께 기타 치고 노래 부르며 아주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진다.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이런 건가 싶더라.

혼자 있는 시간도 가져보고, 일 때문에 못 잔 잠도 좀 자고,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며 그동안 못했던 거 '한'풀이 실컷 했는데, 돌아오니 한국이 짱인 것 같기도 하고. 요새 아주 애국자가 돼버렸다. 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밥이랑 김치만 먹어도 좋다. (아직까진)


오랜 시간 준비한 만큼 여행의 의미가 남달랐을 것 같다.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와 여행을 통해 얻은 건 무엇인가?

확인해보고 싶은 게 크게 세 가지 정도 있었다. 브라질 쌈바의 뿌리, 서아프리카의 전통춤과 리듬. 그리고, 내가 거기서도 먹히는가. 이 세 가지. 내가 더 나다워지는, 나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모두 다 만족스러웠다. 여행에서 느낀 걸 토대로 유투브를 준비 중이다. 거기서 자세하고 깊이 있게 다뤄보겠다.



출처-Rototom Sunsplash


2019 로토톰 페스티벌 공식 인스타그램에 태극기가 보여서 너무 반가웠다. 활동가 다운 김한의 특별한 퍼포먼스 덕분에 참가한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 같은데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나도 제보로 확인했는데 로토톰 인스타그램에 태극기가 나오는 순간이 굉장히 짧다. 눈을 부릅뜨셨나보다. 페스티벌이 열리는 7일 중 3일은 바르셀로나에 있는 친구와 함께 나머지 4일은 혼자서 페스티벌을 즐겼다. 대충 한국인이 두 명 있었다가, 한 명으로 줄었다는 얘기다. 7개의 스테이지에서 각기 다른 결의 레게 공연이 펼쳐진다. 각자 취향대로 입맛대로 놀면 된다. 그래서 스타일도 제각각이다. 앉아서 즐기는 사람, 도가니가 남아나지 않을 것처럼 춤추는 사람, 나처럼 혼자 왔거나 아이들과 함께 온 부모, 할머니와 손자가 같이 오는 경우도 보았다.

전설적인 레게 아티스트부터 현재 자메이카를 대표하는 레게 뮤지션 그리고 신진 루키까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초대박 라인업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해변에 스테이지를 하나 더 운영하면서 셔틀버스를 운영한다. 사람들은 셔틀버스를 타지 않고 나처럼 자전거를 대여해서 가거나 걸어서 가는 경우도 있다만 거리는 조금 멀다. 해변에 가면 뜨거운 태양 아래 큰 사운드 시스템에 몸을 맡기거나 수영을, 모래사장에서 연인 혹인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데, 스피커 옆에서 댄스 워크숍이 열리기도 한다. 지치거나 더위를 먹지 말라고 춤추는 사람들에게 호스로 물을 계속 뿌려준다. 이 기억이 정말 찐하다. 페스티벌에서 캠핑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동 주방과 공동 샤워실이 있는데 샤워실은 남녀 공용이다. 처음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금방 적응되더라. 주방에서는 남은 식재료나 음식들을 쉐어링 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이용한다. 진짜 라스타파리안들은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채식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다양한 비건 푸드들을 체험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한국에서 온 레게팬이라며 나를 굉장히 환호해 주었고, 덕분에 소중한 추억도 많이 만들었다. 챙겨간 태극기로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전설적인 레게 뮤지션들에게 한국 레게 팬들을 축복하는 메시지를 받고, 마샤 그리피스에게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라들에도 레게 팬들이 있다.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레게 문화를 더 제대로 느낄 수있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을지 질문을 하였고, 따뜻한 포옹으로 대답 받았다. 오피셜에도 영상이 올라갔다. 그치만 마지막에 내가 울기 때문에 대충 뭐 찾아보지 말아 달라고 하는 중.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갑자기 내린 비를 맞고 감기에 걸려 3일 동안 앓아 눕느라 공연들도 많이 놓쳤다. 거기에 마지막 날에는 태극기를 도둑맞아서 태극기를 찾기 위해 많은 친구들이 도와주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한국에서 가져간 5m까지 늘어나는 낚시 뜰채가 탐이났나보다.

아주 이상적이고 완벽한 페스티벌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드레드락이 다 모인 느낌이었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동네에 레게머리를 하고있는 사람은 본인 혼자 아니면 한 두명 정도 더 있다. 이런 내용들이 되게 신기했다. 그들도 어디선가는 한국의 김한인가보다. 그러니 반가울수밖에. 로토톰에서 친구들을 정말 많이 사귀었다. 아주 소중한 친구들이 되었다. 지금도 종종 연락한다.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여행하는 매 순간 크고 작은 이벤트가 있어서 모두 굉장히 특별하고 소중했다. 다 말하라고 얘기하면 다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기억이 선명하다.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얘기해달라 하면 선택하기가 참 어렵다. 한국에서는 항상 마이너한 문화를 좋아하고, 남들과 다르고 이런 이미지가 있어서 문화적 외로움을 느꼈다. 여행 기간 동안 아시아인 인 걸 제외하고, 바르셀로나에서 쌈바, 영국에서 레게, 코트디부아르에서 춤과 리듬들을 접하는 동안 주변에 같이 좋아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너무 편하고 좋더라. 말하지 않아도 좋음을 공유하는 그 순간들이 있다. 눈빛이나 마음으로. 이런 순간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느낌을 밖에서 찾지 않고 한국에 돌아왔으니 한국에서는 어떻게 느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중이다. 재미있는 걸 다시 만들어야 하는 순간이 오고 있다. 단!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반대로 여행 중 가장 집에 가고 싶었던 순간은?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6개월 차에 현타가 온다더라. 이때가 코트디부아르에서 워크숍을 듣는 기간이었는데 유럽에서 실컷 놀고 들어온 직후라 배움의 의지와 초심이 흐려져 있었다. 이번 여행의 핵심적인 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체력도 많이 떨어져 배탈이 자주나 화장실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소화를 잘못시켜 입맛도 사라져 몸도 마음도 아주 힘들었다. 그때 한국에 있는 가족, 친구들, 사람이 그리웠다. 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결국 다 지나가더라. 정답을 밖에서 찾으려다 결국 내 문제라는 걸 깨닫고 스스로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다시 뽜이팅있게 지냈다. 바로 다음 문제가 터지긴 했지만. 코로나... 코로나19 사태가 터져서 한국에 못 돌아올 뻔했다.




시종일관 긍정 마인드로 살아가는 김한의 에너지 원천은?

나는 내가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잘 못 느낀다.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뭐랄까.. 처음부터 안에 내재되어 있다고 해야 하나. 하도 많이 들어서 내가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건 이제 조금 알겠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에도 적어 놨다. 'HTPE'라고. 성격유형 테스트 아니고, 'Han The Positive Energy'의 줄임말이다. 요새 줄임말이 대세라고 했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 편이다. 급격하게 졸음이 온다거나. 과민성대장증후군도 있다. 생각해보면 남들도 겪는 비슷한 증상들이긴 하다만. 뭐, 그러다 보니 돌아 돌아 가게 되었나보다. 크게 힘들어 본적이 없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나보다 고생하는 사람도 많고, 다들 이 정도 고생은 하는 것 같고, 특별히 아픈 곳 없이 하고 싶은 일들 하면서 사니까 그런 것 같다. 부족한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많아서 힘이 난다.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

레이브를 만들어보고 싶다. SCR 스튜디오에서 압생트 마시고 한 말인데, 전 세계 라이브로 송출되어버렸다. 야외에서 하는 무료입장 파티로 하고 싶다. 야외니까 입구도 출구도 없는 거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파란 하늘 보면서, 술 마시면서, 노래 들으면서 놀다가 눈 마주치면 같이 놀아요! 하는 그런 파티. 예전에 하나 있었다. '개더게'라고 '개 더울 때 게더링'의 줄임말인데, 여기까지만 얘기하겠다. 대략적인 그림은 그려졌는데, 부족한 게 많다. 돈도 없고.


남은 2020년도 계획.

벌써 5월이 오고 있다. 한국에 없었던 시간만큼 열심히 살려면 더 많이 놀고, 더 많이 일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걱정할 시간도 부족한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계획이라는 걸 세우면 보통 무너지더라. 쓰러지거나 틀어지는 게 아니라 폭탄 맞은 것처럼 사라진다.

예를 들면, 전역하기 전에 다들 일자리를 구하길래 나도 주변의 도움을 구하여 독립영화 촬영 보조일을 알게 되었다. 촬영 보조를 하면서 촬영일을 배울 계획이었는데 전역을 얼마 앞두고 주연 배우가 아파 영화 촬영이 무산되었다. 나는 시작도 못 해보고 백수가 되어버린 셈. 그래서 폴딩도어랑 샤시일을 하게 되었는데, 신체조건이 불리해서 노가다도 쉽지 않더라. 오전에 일하면 저녁 전에는 끝난다기에 저녁에 합주 갈 계획을 세웠는데, 합주 없는 날에는 일이 없어서 놀고, 합주하는 날에는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나도록 작업이 안 끝나더라. 멤버들 합주할 때 나는 편의점에서 김밥 사와서 잔업 하는데,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싶어 또 그만두고 시작한 게 홍대 나비 바. 주문 들어오면 물담배 만들어서 내주고, 그때 만난 친구가 별이라고 바르셀로나에서 석 달 조금 못 되는 기간 동안 먹여주고 재워준 친구다. 그러다 나비를 나와 합정 자이온보트에서 저크치킨을 만들게 된다.

이 정도면 처음 계획이 기억 나겠는가? 여행이 끝나고 한국 돌아와 다시 자이온보트에서 일하고 있는 걸 보면 나는 당장 나한테 주어진 일만 잘하면 될 것 같다. 괜히 계획 같은 거 세우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잠은 죽고 나서 자던가 해야지 뭐.


마지막 질문이다.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로 기억되고 싶은가?

: 은혜갚은 김한




글 & 사진 | 이보람, 신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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